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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의 배경과 준비(1)

Apr 21, 2015 09:11 AM EDT

종교개혁

'종교개혁'(Reformation)은 교회 역사의 발전 과정에 비추어 볼 때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종교개혁은 지난 날 역사 발전 과정에서 빚어진 잘못과 오류들을 시정하고 개혁하여 본래적 기독교의 모습을 되찾자는 '회복 운동'이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의 이념은 분명히 중세 기독교의 붕괴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중세 기독교의 '정화'와 기독교 이념의 '부흥'과 '회복'에 그 궁극적 목적을 두었다고 할 수 있다. 베인톤 교수는 종교개혁이 중세의 교회 구조와 사회 체제를 산산이 부서뜨렸음에도 불구하고 종교개혁은 '종교의 부흥'(revival of religion)을 가져왔고 '기독교의 갱신'(renewal of Christendom)을 가져왔다고 말했다. 물론 종교개혁을 부르짖다가 도에 지나친 주장을 하는 잘못을 범하기는 했다.

이제 종교개혁을 가져올 수밖에 없게 했던 '역사적 배경들'을 살펴본다. 종교개혁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던 역사적 요인들로는 중세 기독교의 타락, 특히 '교황청의 부패와 타락'을 들 수 있다. 또 '국가주의'(nationalism)와 '인문주의'(humanism)의 흥기 및 '스콜라 신학의 붕괴'와 중세기 말의 '신비주의' 및 '종교적 경건'을 들 수 있다.

교황청의 부패와 타락

1305년부터 1378년까지 70여년 동안 교황청은 로마에서 프랑스 남단 아비뇽(Avignon)으로 옮기게 됐다. 소위 이 '교황청의 바빌론 포로시대'(the Babylonian captivity of the papacy) 동안 교황청은 극도로 타락하게 되어 교황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게 됐다. 로마의 교회 재산이 이태리 귀족의 손으로 넘어간 이후 아비뇽 교황청은 재원의 결핍을 겪게 됐다. 특히 로마의 실지를 되찾기 위해 용병을 고용했는데 용병 유지를 위한 비용을 지불해야 했으므로 많은 재원을 필요로 했다. 아비뇽 교황청이 당면한 재정 문제를 해결한 이가 바로 '돈 만드는 천재'(financial genius)로 불린 교황 요한 22세(John XXII, 1316~1334)였다.

교황 요한 22세는 기존의 징세 방법을 모두 동원하고 새로운 징세 방법을 고안해 냈다. 프랑스, 영국, 독일의 교회들과 성직자들에게 적용한 징세방법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 임직세(annates) 새로 임명된 감독이 첫 해의 수입 전부를 교황에게 바치는 세 ▲ 특수 임직세 감독직에 공석이 생길 경우 다른 곳의 감독들을 공석에 임명하고 그들의 첫해 수입을 모두 받아들이는 세 ▲ 공석 임명 보류세(reservations) 감독직에 공석이 생길 경우 교황이 감독 임명을 보류하고 새 감독이 받아야 할 수입을 교황이 대신 받는 세 ▲ 대기세(expectations) 공석이 될 가능성이 있는 (연로한 감독이 사망할 경우 등) 감독직의 후보자들에게 임명을 약속하고 그들로부터 미리 받아들인 세 ▲ 서약 변경세(commutations) 성직자가 행한 서약에 해약을 허락하는 대가로 받아들인 세 ▲ 성직매매세(simony) 성직을 매매하는 대가로 받아들인 세 ▲ 면죄부세(indulgences) 면죄부세는 성자들이 쌓은 공로는 자신들의 구원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사죄하고 구원하는 혜택까지 줄 수 있다는 교리에 근거했다. 즉 교황이 면죄부를 사는 사람들에게 성자들의 공로의 혜택을 나누어 주면 면죄부를 사는 사람의 죄 값으로 치러야 할 처벌(penalties)을 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다양한 징세 방법을 실시하므로 아비뇽 교황청은 결국 프랑스 왕보다 더 많은 재원을 갖게 됐다. 교황청은 이 수입의 3분의 2 가량을 잃어버린 이태리 교회 재산을 되찾기 위해 전쟁 비용으로 사용했다. 나머지는 교황청의 사치를 위한 비용으로 썼다. 독일과 영국이 프랑스 왕의 지배를 받고 있는 아비뇽 교황청에 대해 노골적으로 불만을 나타내며 교황청을 무시하자 아비뇽의 마지막 교황 그레고리 11세(Gregory XI)는 1377년 프랑스를 떠나 로마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의 추기경들(cardinals)은 아비뇽에 머물면서 새로운 교황클레멘트 7세(Clement VII)를 선출했다. 그 후 1417년에 이르기까지 두 개의 교황과 두 파의 추기경들이 로마와 아비뇽에 각기 군림하면서 교황청은 대 분열(the great schism)을 겪게 됐다. 영국, 보헤미아, 독일 등은 로마 교황청을 지지했으며 프랑스, 스페인, 스코틀랜드는 아비뇽 편에 가담했다. 유럽 곳곳에서는 두 파의 감독들이 벌이는 싸움으로 혼란과 분열을 거듭하게 됐고 그 결과 교황청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게 됐다.

교황청은 이태리 도시 국가의 하나로 전락됐고 교황들은 외교에 능숙하고 전쟁에 무자비하고 예술과 문학에 뛰어나고 도덕적으로 방자한 군주처럼 처세하게 됐다.

교황 알렉산더 6세(Alexander VI, 1492-1503)는 성직자의 축첩제(clerical concubinage)를 교황청에 도입시키는 등 교황청을 극도로 부패케 한 인물이었다. 교황 알렉산더 6세는 첩과의 사이에서 4명의 사생아를 가졌다. 플로렌스(Florence)에서 세례 요한처럼 회개를 부르짖으며 로마 교황청의 부패를 통박했던 도미니칸의 수사 사바나롤라(Savanarola)는 "자식을 못쓰게 만들려면 성직자를 만들라"는 말까지 했다. 당시 어떤 감독(Henry of Liege)은 많은 첩을 두어 22개월 동안에 14명의 사생아를 만들었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루터 당시 교황 레오 10세(Leo X, 1513~1521)는 사냥과 예술을 즐긴 도박꾼으로 유명했는데 그의 도덕적 타락은 현대 가톨릭 역사가들도 인정할 정도다.

루터는 「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보내는 서한」(The Address to the Christian Nobility of the German Nation)에서 새 여호수아가 일어나서 로마에 있는 여리고 성들을 무너뜨리게 될 것을 암시하면서 다음과 같이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자칭하며 베드로의 후계자라고 뽐내는, 기독교의 우두머리라고 하는 자가 어떤 왕이나 황제도 따라갈 수 없는 극치의 세속적 영화 속에서 사는 것을 볼 때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황제가 1층 왕관을 쓰는데 교황은 3층 왕관을 쓰고 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추기경들은 교회를 위해서 하는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도둑놈처럼 돈에만 정신을 팔고 있다. 로마로 흘러 들어가는 돈은 마치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격이다. 교황청의 부패상은 글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하니 성직 매매, 술주정, 사기, 도둑질, 강도질, 사치, 매춘 행위, 협잡질 등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로 가득 차 있다. 적그리스도가 다스렸다고 해도 이보다 더 부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