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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길(1)

Jul 21, 2015 11:12 PM EDT

cross

마태복음 16:21, 24, 25

십자가는 기독교의 핵심이고 성경의 핵심이다. 기독교의 핵심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다. 십자가는 우리의 운명과 삶을 변화시킨다. 저주가 축복으로, 미움이 사랑으로, 원수 맺음이 화해와 평화로 변화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는 영광을 버리시고 떠나셔서 "고난"과 "죽음"의 길인 "십자가의 길"로 걸어가셨다. 왜 그렇게 하셨는가? 온갖 죄악을 범함으로 심판과 저주를 받아 마땅한 우리 죄인들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였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태어나실 때부터 "가난"과 "고난"과 "피난"의 길을 걸어가셨다.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눅 2:6, 7).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마 2:14, 15). 33년 동안의 예수님의 삶도 "가난"과 "고난"과 "나그네" 길의 연속이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마 8:20). 예수님의 삶은 "십자가의 길" 그 자체였음을 볼 수 있다. 

때가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높이 들려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알리기 시작하셨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마 16:21). 사실 선지자 이사야는 오래 전에, 메시야가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멸시"와 "싫어 버림"과 "간고"와 "질고"와 "슬픔"과 "아픔"과 "고난"과 "찔림"과 "상함"과 "징계"와 "채찍"과 "죽임"을 당하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실 것을 구체적으로 예언했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3-5).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사 53:12).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십자가의 삶을 사시기 위해서였다. 많은 사람들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였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로 걸어가시면서 보여주신 모습이 어떤 모습이었는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와서 자기를 잡으려고 하는 자들을 향해서 분노와 증오와 저주의 모습을 나타내 보이셨는가? 아니다. 저들을 향해서 칼을 뽑으려는 베드로를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마 26:52-54). 그리고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로마 군인들을 바라보시면서 분노와 증오와 저주의 모습이 아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모습을 나타내 보이시면서 다음과 같이 기도하셨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로 걸어가시면서 드러내신 모습은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깊은 세계였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로 걸어가시면서 이루신 일이 어떤 일이었는가? 죄악의 세력들을 처벌하신 공의로운 심판이었는가? 아니었다. 모순되게 보이는 듯한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악독한 죄인들에게 베푸신 일이었다.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로마 군인들을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시면서 저들을 위해서 이렇게 기도하셨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로마 군인들은 무척 놀랐을 것이다. 그 상황을 바라보던 로마 군인들의 대장인 백부장이 무척 놀랐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마지막에 하늘을 향해서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기도하시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백부장은 다음과 같이 회개의 고백을 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되어 있다.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눅 23:47). 악독한 죄인들인 로마 군인들과 백부장에게 죄 사함과 구원의 은혜가 임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로 걸어가시면서 이루신 일은, 자기를 못박는 악독한 죄인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임하게 하신 일이었다.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평생 죄만 짓다가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던 악독한 강도 한 사람에게도 구원의 은혜가 임하게 하셨다. 그 강도는 신앙고백을 제대로 한 일이 없었다. 물론 세례도 받지 못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로 걸어가시면서 악독한 강도에게 구원의 은혜가 임하게 하셨다. 강도가 고백한 것은 다음과 같은 말 한 마디뿐이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눅 23:42). 그런데 악독한 강도에게 놀라운 구원의 은혜가 임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어떻게 이런 모순되는 듯한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는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순종하심으로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길"은 심판과 저주를 받아 마땅한, 악독한 우리들 모두에게 죄 사함과 구원의 은혜를 가져오는 놀라운 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찬송을 부른다. "놀랍다 주님의 큰 은혜 우리의 죄를 속하시러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어린 양 보혈을 흘렸네 주의 은혜 우리의 죄를 다 씻었네 주의 은혜 우리의 죄를 다 씻었네"(137). 우리는 또 이렇게 찬송을 부른다. "만 왕의 왕 내 주께서 왜 고초 당했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그 보혈 흘렸네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 나의 맘에 큰 고통 사라져 오늘 믿고서 내 눈 밝았네 참 내 기쁨 영원하도다"(138).

우리들은 "십자가의 길"이 아닌, 넓은 길, 세상의 길을 걸어가길 기뻐한다. "십자가의 길"로 걸어가신 주님을 바라볼 수 있는 눈도 없고, "십자가의 길"로 걸어가시면서 하신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도 없고, "십자가의 길"로 걸어가시면서 나타내 보이신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가슴도 없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십자가의 길"을 싫어하고 피하려고 하는 못된 기질과 성품만을 지니고 있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들 모두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손길을 펴시기를 간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십자가의 길"로 걸어가신 주님을 바라볼 수 있도록 우리들을 도와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그리하여 못난 우리들로 하여금 주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로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걸어갈 수 있게 해 주시기를 바란다.